-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내러티브와 장르 - 미디어 분석의 핵심 개념들' 리뷰 독후감
내러티브라는 단어는 대학교 다닐 때, 그리고 임용 공부할 때 정말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단어이다. 하지만 단순히 역교론 책에 있는 단어 정도로 이를 인식했을 뿐이지, 한 번도 깊게 탐구했던 적은 없었다.
우리는 흔히 '내러티브'라고 하면 단순히 '이야기' 정도로 인식을 한다. 대중들에게는 '스토리텔링'이라는 단어로 말하면 좀 더 익숙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역사를 흔히 '스토리텔링'식으로 전개하면 이해가 잘 된다고 한다. 한국사 강사들이 자신의 강의를 홍보할 때 많이 쓰는 단어이기도 하다. 나는 그냥 이 정도로만 이 단어를 이해하고 그 이상으로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다시 이 단어에 대해 깊게 탐구할 기회가 생겼다. 내러티브를 잘 알아야 앞으로 내가 만들 역사 수업도 더 잘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시중에 내러티브 관련 책을 찾다가 집어든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지금부터 서술할 책의 내용은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대목만 요약했고 정말 많은 부분들을 생략했으니 이 점 양해 바랍니다)
내러티브란 무엇인가?
이 책은 영국에서 만들어진 책으로, 학부생들이 내러티브를 이해할 때 교재로 쓰이는 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수준 자체도 학부생들에 맞춰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이해하는 데 조금 애를 먹었다. 간만에 전공 수준의 책을 읽으려니 도통 읽히지가 않아서.. 그래도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이해한 내용을 여기에 요약해보겠다.
우선 내러티브에 대한 정의부터 구체화 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잠시 스토리, 플롯, 텍스트 등에 대해 먼저 정의를 내리자면
텍스트가 글로 구성된 모든 것이라면
스토리는 명시된 텍스트로 추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간의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며
플롯은 그 스토리를 우리가 볼 수 있는 순서대로 구성한 것이다.
좀 더 쉽게(그리고 토도로프라는 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표현하면
스토리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플롯은 저자가 그 일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순서이다.
그렇다면 내러티브는? 내러티브란 일련의 사건이나 정보들을 인과적이고 논리적인 순서로 제공한다. 그러나 요리 레시피도 정보를 인과적이고 논리적으로 제공한다. 따라서 내러티브는 아래의 구성을 따른다(토도로프의 제안).
1. 원래의 균형 상태
2. 어떤 행동에 의한 균형 상태의 붕괴
3. 문제 발생에 대한 인지
4. 문제 발생을 해소하려는 시도
5. 균형 상태의 회복
어떤 이야기가 이 5가지 틀에 해당된다면 내러티브인 것이다. 즉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이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이 포함되어야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내러티브의 구조가 완성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글이 내러티브로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은 텍스트가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중요하지 않다. 뉴스 보도는 물론이고, 음악, 퀴즈 쇼도 마찬가지이다. 교향곡과 같은 음악도 C장조로 시작해서 여러 코드와 장조를 왔다갔다 하다가 마무리에는 보통 C장조로 마무리된다. 그것을 저 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내러티브와 장르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장르이다. 이 책의 제목이 왜 내러티브와 장르이겠는가? 장르라는 것은 바로 내러티브를 표현하는 틀이다. 어떤 장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러티브가 나타나는 방식이나 내러티브의 효과도 조금씩 달라진다.
사실 여기부터는 흥미가 살짝 떨어졌지만, 어떤 장르에서 어떤 클리셰를 동원하는가도 알면 좋을 것 같아서 간략하게만 언급한다.
1. 느와르 : '장르는 사회를 반영한다'
느와르 물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이다. 대개 느와르 물의 주인공은 내러티브를 통해 성장하는 경험을 치르면서 공포스러운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고 한다(우리 기준으로는 올드보이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 공포스러운 시절의 기저에는 서구 사회가 경제적 성공에 대한 대가로 치르는 높은 범죄율과 자살, 이혼, 마약 등 낮은 삶의 질이 깔려 있다.
여주는 대개 팜므파탈로 표현된다. 느와르 장르가 발달한 시점은 2차 세계대전 이후를 전후하고 있는데, 여성의 능력이나 지위, 정체성의 변화 등이 기존의 수동적인 여성 캐릭터에서 팜므파탈로의 전환을 이끌어 냈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느와르 물은 기본적으로 내러티브도 상당히 복잡하고 뒤엉켜있으며, 가정보다는 사회와 같은 공적 배경을 선호한다. 이런 요소들은 느와르가 다분히 사회 고발적이고, 반전통적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2. 경찰 : '이항적 대립'의 본보기
경찰물은 언제나 대중들에게 사랑받는 장르이다. 지오프리 허드라는 학자에 따르면 경찰물과 같은 범죄 시리즈는 7가지의 이항적 대립을 따라간다고 한다.
1. 경찰 대 범죄
2. 법과 규정(규정을 어기면서까지 범죄자를 잡을 것인가?)
3. 전문직업주의 대 조직(경찰 조직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
4. 권위 대 관료제(하급자가 상급자보다 보통 더 우수)
5. 직관 대 테크놀로지(형사의 직관이냐, 과학기술이냐)
6. 대중 대 지식인(경찰이 생긴 것은 대중적이지만, 직관 능력은 매우 우수)
7. 동료애 대 계급
내러티브의 이항적 대립에서 한 쪽을 옹호한다는 것은 곧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판단이될 수 밖에 없다. 경찰 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경찰은 범죄를 해결하는 역할만 하지 않고, 정부가 지명하는 대상을 감시하는 역할도 담당한다(우리나라로 치면 국가 전복을 노리는 간첩, 산업 스파이 등등..?). 하지만 그런 모습을 내러티브에서 노출하지는 않는다.
쉽게 표현해보면 경찰물이 등장하던 초반에는 항상 경찰의 선한 모습만, 범죄예방적인 모습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경찰의 부패나 어두운 모습을 다룬 작품들도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런 작품들은 보기 드물다. 왜냐면 반발이 심할 테니까. 이른바 '악당으로서의 경찰'은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도 내러티브에서 추구하는 이항적 대립의 특징이 여기서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선을 만들면 필연적으로 악을 만드는 것이 이항적 대립의 숙명이다. 그러면 선한 요소는 악한 것을 가지고 있어도 선으로 포장해야 한다. 사실 역사의 본질과는 맞지 않는 것이다. 내러티브 텍스트가 비판적 관점을 기르는 것에 취약하다는 것이 바로 여기서 드러나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들이 할 일은 이 내러티브적 설명에 이항적 대립을 넣으면서도 어떻게 비판적으로 텍스트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 것이다. 다양한 관점을 소개하는 것이 정답일까? 많이 고민이 되는 시점이었다.
그 외에도 SF, 호러, 로맨스 등에 대해서도 분석을 했지만 그 예시가 되는 작품들이 서구권 문화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어 우리나라 정서에 공감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고 분석 또한 마찬가지 였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도록 한다.
장르 비평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는 버거라는 학자가 제시한 12가지 미디어 텍스트 접근 방법을 제시한다. 책에서는 3페이지만에 후다닥 끝내버렸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인상 깊게 봤기 때문에 여기에 다 소개하고자 한다.
1. 장르 진화의 역사적 연구 : 장르의 역사 탐구
2. 텍스트와 장르의 관계 : 이 텍스트는 어떤 장르인가?(주로 텍스트 안에서 장르의 특징을 탐구함)
3. 장르가 서로 어떤 관련을 맺는가 : 여러 장르가 결합되어 있는지 확인
4. 특정 시기에 인기 있는 장르를 서로 비교 : SF와 액션 장르를 비교
5. 장르를 국가 별로 비교 : 미국의 병원 드라마와 한국의 병원 드라마를 비교
6. 여주인공과 남주인공 분석 : 주인공과 악당의 특징 분석
7. 장르가 사회와 문화를 어떻게 반영하는가 : 힙합이 흑인에게 어떤 호소력을 가지는지 등
8. 신화적 내용이 텍스트와 장르에 미치는 영향 : 해당 국가의 신화가 장르에 반영됨(내 생각이지만 미국에서 흔히 말하는 서부 액션 영화가 등장한 것은 미국은 딱히 신화가 없는 나라고 개척을 통해서 국가가 발전했기 때문에 서부 개척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 아닐까? 쓰고 보니 7번에 더 적합한 것 같기는 하다.)
9. 장르의 인기 등장과 쇠퇴
10. 매체별 장르의 차이 : 출판업계와 영화업계가 SF를 다루는 정도의 차이
11. 장르가 수용자에게 어떤 이용과 충족을 제공하는가? : 말 그대로다
12. 기술적 문제가 장르에 미치는 영향 : 지금으로 예시를 들자면 CG 기술의 발전이 영화 장르에 미치는 영향 정도가 될 것 같다.
책에서는 장르 분석이라고 했지만 미디어에 나타난 내러티브를 분석하는데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적어보았다.
결론 : 내러티브와 장르의 관계
저자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내러티브와 장르를 설명하는 것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내러티브
호러, 액션, 판타지 등(내러티브 장르)
쏘우, 탑건, 반지의 제왕 등(내러티브와 장르 텍스트)
이러한 구성이 피라미드처럼 관계를 짓는다고 저자는 얘기한다. 즉 우리 주변에 영화가 존재 한다면, 그 영화들에서 장르를 뽑아낼 수 있고, 여러 장르들을 통해서 내러티브를 뽑아낸다는 것이다. 왜 내러티브를 위해서 장르 분석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나의 느낀 점
우선 이 책이 생각보다 사례가 많았고, 그러한 사례를 중심으로 장르를 분석했기 때문에 좀 읽는데 애로사항이 많았다. 사전에 보지를 않았으니 장르 분석에서 무릎을 탁 치는 대목도 없었다. 거기다가 외국 영화니까 더더욱..
그리고 내러티브가 메인이라기보다는 미디어 분석이 메인이라는 느낌도 강했다. 내러티브는 그것을 분석하는 데 도움을 주는 수단 정도? 라는 생각을 읽는 내내 지울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의미있는 시사점들은 많이 얻어갔다. 우선 내러티브의 6단계 구성부터 인상적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역사적 스토리들을 내러티브의 틀 안에 넣어서 구성한다면 꽤나 완성적일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장르별로 특징이 있듯이, 역사적 스토리에도 특징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에서 장르를 굳이 나누자면 전쟁, 국가의 발전 과정, 특정 사건의 흐름, 제도 등이 있을 것이다. 내러티브라고 보기 힘들었던 음악, 퀴즈 쇼, 뉴스 등에도 내러티브적 요소들이 들어있었듯이 역사에서도 내러티브로 엮기 힘들다고 평가받는 제도사/경제/문화 분야도 사실은 내러티브적 요소들을 도입해볼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르에서 많이 쓰이는 요소들이 있듯이, 역사 장르에서도 그러한 요소들을 만들어서 엮어 보면 내러티브를 아주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책의 수많은 페이지들은 나에게는 쓸모 없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아주 쓸모 있었다.
마지막으로 버거라는 학자가 우리의 일상과 내러티브에 대해 이항적 대립으로 분석한 항을 제시하겠다.
현실 vs 매개됨(실제로 버거는 허구적이라는 용어를 썼으나, 저자가 매개됨으로 번역함)
모두 중간 vs 시작, 중간, 결말
산만함 vs 뚜렷함
갈등이 무작위적 vs 갈등이 치열하고 빈번하게 일어남
같은 행위의 반복 vs 스토리가 항상 다름
모호한 목표 vs 구체적인 목표, 그리고 호기심
무사안일 vs 다사다난
예술의 모방 vs 삶의 모방
우리의 일상은 '중간'의 연속이고 매우 지루해보이지만 내러티브로 엮어서 이야기한다면 재밌어지는 마술이 된다.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재미없어 보이는 스토리들도 내러티브로 엮는다면 매우 흥미진진해진다. 그리고 역사의 장르(전쟁, 발전, 제도, 경제 등)는 그것을 담는 요소일 뿐이고. 좀 더 역사를 내러티브로 엮을 수 있도록 많이 고민해봐야겠다는 귀감을 나에게 주는 아주 좋은 책이었지 않나 싶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