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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윤리 대논쟁 독서 후기
나는 평소에 중고 서점 알라딘을 즐겨 다닌다. 구매할 책을 미리 찾고 가는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가끔씩은 아무 계획 없이 가기도 한다. 그러다가 뜻 밖에 괜찮은 책을 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늘 리뷰할 이 책은 그 '뜻 밖의 괜찮은 책' 중에 하나이다. 알라딘 신촌점을 뒤적거리다가 제목이 뭔가 재밌어 보여서 집어든 책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매우 재밌게 읽었던 책이었다(제목과 표지에 낚여서 실패한 책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감격 그 잡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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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윤리 대논쟁 |
참고로 저자인 최훈씨는 강원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교수라고 한다. 구글링을 해보니까 비판적 사고와 동물 윤리 등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다.
'동물 윤리 대논쟁'의 핵심 쟁점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쟁점이 많이 나오는데, 여기서 모든 부분을 다 논할수는 없기 때문에 내가 개인적으로 재밌게 읽었던 부분들만을 선정해서 논해보고자 한다.
1. 동물의 도덕적 지위는 존재하는가?
사실상 이 책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는 질문이다. 동물에게 도덕적 지위가 없다면 애초에 동물 따위를 보호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있다면 당연히 그 지위를 지켜줘야 하니까. 이에 대해 저자는 '있다'로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다.
우선 도덕적 지위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어떤 대상을 도덕적으로 대우하고 고려하는 것이다.
도덕적 지위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저자에 따르면, 간접적인 도덕적 지위와 직접적인 도덕적 지위가 있다.
간접적 지위란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돌멩이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도덕적 지위가 없다. 하지만 그 돌멩이가 만약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였다면?(이건 내가 든 비유이다) 엄청난 고고학적 가치를 지니니 당연히 훼손하면 문화재보호법에 의해 처벌받게 된다. 이것이 간접적 지위의 의미이다.
직접적 지위란 말 그대로 그 자체로서 직접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때 여기서 저자는 (싱어가 주장했던 유명한) 한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이익 평등 고려의 원칙'이다. 이것은 어떤 윤리적 판단을 할 때는 개인의 관점이 아니라 그 판단에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흔히 말하는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이 잘못된 것도 바로 이 원칙 때문인 것이다. 인간을 위한 정책을 실시하려면 남성과 여성, 흑인-백인-동양인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도 다 영향을 받으니까.
(가끔씩 이런 얘기를 하면 '그러면 동물한테 아예 학교도 다니게 해 줘야겠네?', '동물도 이발 안해주면 동물 학대네?' 이런 식으로 논리적으로 태클을 거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사람들이 있지만, 동물은 학교를 다니고 싶어하는 욕구도 없고 이발을 하고 싶어하는 욕구도 없다. 동물들에게 있어서 이발을 하거나 학교를 다니는 것은 애초에 이익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이익 평등 고려의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논리가 성립 가능하다.
'기본적인 이익 또는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 인종이나 성별뿐만 아니라 종도 똑같이 대우해줘야 한다' 라는 것이다. 이때 그 능력의 기준은 바로 '고통'이다. 즉 어떤 개체가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그 개체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논리를 바탕으로 닭장식 사육이나, 고통스럽게 가축을 도축하는 행위 등을 비판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동물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이 논점이 뒤에 나오는 숱하게 많은 논점들의 논리적 기반이 되는 것 같다. 동물에게 도덕적 지위가 있다고 결론을 내렸으니, 동물에게 해가 될 수 있는 모든 행위들은 전부 다 위배되는 것이다(동물원도 마찬가지).
그래서 나는 이 첫 번째 챕터를 여러 번 읽어봤다. 혹시 논리적으로 헛점이 있지는 않는가. 그런데 딱히 깨지를 못했다. 그리고 솔직히 그냥 맞는 말 같다. 애초에 동물을 먹고 맘대로 다루는 행위 자체가 인간이 동물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쉽사리 할 수 없는 짓 같기도 하다.
2. 동물 실험은 옹호되어야 하는가? 금지되어야 하는가?
하지만 그 중에서도 결이 살짝 다른 부분이 바로 이 동물실험이다.
우선 저자는 동물실험에 대한 찬성 측의 주장을 정리했다.
첫 번째, 인간과 동물은 생물학적으로 유사하다. 그래서 동물을 상대로 신약 실험을 시도해서 안전하게 일반화해야 한다.
두 번째, 인간의 생명을 위해서 필요하다. 의학의 진보가 수많은 인간들의 목숨을 구했으며, 그것은 일부 동물들의 희생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이나 노숙자들에게 실험할 수는 없지 않는가?
세 번째, 동물 실험의 마땅한 대안이 없다. 조직 배양 기술이나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그나마 대안이라면 대안이겠지만, 신뢰도가 크게 떨어진다.
그리고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 주장들을 반박한다.
첫 번째, 인간과 동물은 생각만큼 유사하지 않다. 이 부분은 저자가 탈리도마이드의 부작용 사례 등 엄청나게 다양한 사례를 들어 비판하고 있으니 책을 직접 읽어보시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만약 인간과 동물이 유사하다면 그것은 더더욱 동물 실험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왜냐면 유사하잖아?
두 번쨰, 인간의 생명 보전에서 오는 이익과 동물 실험으로 동물이 겪는 고통 중 무엇이 더 이득인지 직접적 비교가 불가능하다. 설령 전자가 더 이득이라 하더라도 동물 실험을 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지만 하지 않는 행위보다는 동물 실험을 (굳이) 함으로써 동물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위가 더 나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아무것도 안 하는 무위보다는 일부러 행하는 해악이 더 나쁘다는 논리이다.
세 번째, 사실 가장 확실한 대안은 사람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실험할 수 없다면 인간과 도덕적 지위가 비슷한 동물에게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동물 실험을 대놓고 반대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적어도 동물 실험 옹호가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3. 부분-인간화 동물은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은가?
내가 제일 흥미있게 읽은 부분이다. 왜냐면 저자는 이 부분에서는 부분-인간화 동물, 일명 키메라에 대해서 비판하는 논리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저자가 보기에 그 비판의 논리가 논리적으로 부실했었나보다.
키메라를 비판하는 논리는 크게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 번째,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아 혐오스러우며,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동이기도 하다.
두 번째, 도덕적인 혼란이 온다. 키메라를 동물로 볼 것인가 인간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도덕적 지위도 달라진다.
세 번째,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다. 엄연히 존중받아야 할 인간의 신체가 동물의 신체에 막혀서 존엄성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리고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 논리들을 비판한다.
첫 번째, 자연과 부자연의 기준이 애매모호하다. 인간이 만들어서 부자연스럽다고 할 것이라면, 교잡종 그루퍼나 노새는 어떻게 보는가? 그것들을 보면서도 부자연스럽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던가? 또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 때문에 반대할 것이라면, 인간이 후손을 낳는 것도 일종의 자연의 섭리일텐데 그러면 비혼주의자는 뭐지?
두 번째, 돼지 심장을 이식 받은 인간이라고 해서 돼지라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세 번째, 키메라 또한 인간의 동의가 있어야 사용 가능하기 때문에 존엄성이 크게 훼손될 일은 없다. 인간에서 분리된 세포라고 하더라도 당사자의 동의가 있어야 사용 가능한 것 처럼 말이다. 또한 키메라가 만약 존엄성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극복해야 할 현실이지 덮어두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 차별이 일어났다고 해서 딸들을 태어나자마자 다 죽일 수는 없지 않는가?
다만 저자는 이렇게 키메라를 반박하는 논리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서 마지막에서는 자신의 논리로 키메라를 반박하고 있다. 즉 키메라 자체가 그냥 세상에 태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바로 인간을 실험실에서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 기술로 인간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기도 하겠지만, 설령 인간을 만들었다고 해도 계속 실험실에 가둬놓고 실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키메라들은 다 실험실에서 가둬놓고 실험하고 있다. 이것 자체가 그냥 문제인 것이다.
더군다가 굳이 일부러 장애가 있는 종을 만들어서 도덕적인 문제를 야기하는 지에 대해서도 저자는 회의감을 느끼고 있다.
사실 이 외에도 동물 식용이나 동물원 등 수많은 논쟁 거리들이 있는데 논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책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 훨씬 더 재밌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여기에 싣지는 않겠다.
'동물 윤리 대논쟁'을 읽고 떠오르는 나의 생각들
우선 가장 중요한 1장의 논리. '동물에게도 도덕적 지위가 있는가?'를 여러 번 읽어봤다고 앞에서 언급했다. 그리고 논리가 말이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생각도 있다. 바로 인간이 우세종이라는 것이다. 그냥 인간은 우세종이다. 다른 동물보다 훨씬 더 우수하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게 생각을 할 수 있고, 언어를 이용해서 기록을 남길 수 있다. 그렇게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다르게 발전을 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다른 동물을 잡아먹기도 했고, 짓누르기도 했다.
때때로 그 행위들이 너무 가혹해 공존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우세종이라는 그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다. 물론 같은 지구를 살아가는 생명체인 만큼 동물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필요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지금 하고있는 동물 포식의 행위는 사실 먼 옛날 자연에서 이루어지던 포식 행위가 조금 달라졌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동물을 잡아먹던 행위를 비판할 사람은 없지 않는가?
사실 우리가 동물을 포식하는 행위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사실 독서평에서 얘기하지 않았지만, 저자의 의견 중 매우 맘에 안 드는 부분 중 하나가 포식의 윤리이다. 저자는 '포식의 윤리' 챕터에서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수준 내에서 포식 동물의 포식 행위에 개입해서 이를 막아야 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포식 행위도 자연스러운 현상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동물 본래의 습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1장에서 그렇게 부르짖었으면서 포식 동물의 습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좀 모순되지 않나 싶다.)
그 모습이 닭장이니 뭐니해서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우세종이 살아남는 현상은 자연적으로 봤을 때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다만 같은 인간들끼리 자꾸 급을 매겨서 문제인 것이지. 같은 인간이라면 모를까, 인간과 다른 종족들을 같은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나는 아직 이 사회가 동물의 권리를 운운하기에는 인권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생각이 든다. 즉, 시기상조이다.
노예 제도가 폐지된지 불과 300년이 채 되지 않았으며, 우리나라에서 신분제가 사라진지 겨우 120년이다. 우리는 지금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떠들어대고 있지만, 200~300년 전에 그런 소리를 했다면 헛소리하는 놈이라면서 길에서 몰매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인권에 대한 합의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아마도 몇 백년은 더 지나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동물의 권리까지 논해야 한다고? 물론 논의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고, 지금부터라도 이렇게 계속 논의가 되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과도기에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동물과 관련된 여러 시도들을 억제하고 막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이 든다. 아무리 동물 인권과 관련해서 열심히 목소리를 내더라도 당장 합의될 사항은 아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좀 더 지켜봐야 한다. 더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고 더 많은 결과물들이 쌓일 때 비로소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는 이런 동물 인권에 대한 논의에 발자국을 내딛고 있는 저자의 행보와 의견을 매우 존중하고 존경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만 독서평을 마친다.
아무튼, 정말 재밌게 읽었던 책이다. 저자의 모든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말 유익하고 견문을 넓혀주는 책이었다. 윤리나 철학을 좋아하거나 동물 인권에 관심이 있다면 정말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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