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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힘
나는 역사교사가 된 처음부터 역사 수업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상당히 많은 고민을 했다. 역사 수업은 곧 나의 정체성과도 같기 때문에 그 방향성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연구했다.
고심 끝에 나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 결론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우선 역사는 객관적 팩트와 다양한 학설들로 완성이 된다.
예컨대 '광개토대왕릉비에 써있는 내용'은 객관적 팩트이지만 이것을 가지고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데 이용하거나 고구려인의 독자적 천하관을 유추해내는 것은 학설의 영역이다. 객관적 팩트를 연구하는 것이 고고학이나 예술에서 할 일이라면, 학설을 만드는 것은 역사에서 할 일이다.
하나의 학설은 객관적 팩트를 기반으로 하여 여기에 논리적 추론과 가설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생각이다. 생각과 상상의 날개를 펼쳐서 다양한 방면에서 옛날 사람들의 모습을 추론하는 것이 바로 역사의 본질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역사 수업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게 아니라 한 번 멈춰서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이 인물이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더 나아가 이를 통해 오늘날의 문제들을 해결해보는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사건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던져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등등..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봄으로써 역사의 본질을 탐구하고 오늘날 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힘을 길러줄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고 나면 이제 중요한 것은 하나다. 그 '생각의 힘'을 길러주는 '질문 만들기'이다.
질문 만들기
최근 역사교육계에서도 '핵심 질문'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보통 핵심 질문은 수업의 본질을 관통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나는 활동지에서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핵심 질문을 던지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꼬박꼬박 질문을 만들었다. 매 학기 방학마다 활동지의 질문을 만들고 제작하고 고민하고 연구했다. 사실 이번 방학에도 활동지 질문을 보완해서 다시 만들어야 하는데 귀찮다 ㅎ
보통 한 활동지에 최대 2개 이내로 질문을 실었으며(경험상 3개를 넘어가는 순간 아이들이 너무 힘들어한다), 대신 활동지를 매 시간까진 아니어도 한 주에 한 번 정도는 작성할 수 있도록 촘촘하게 짰다. 그리고 작성할 시간을 주기 위해 활동지를 작성하는 날에는 수업을 항상 10~15분 정도 일찍 끝냈다.
일반적인 아이들은 보통 그 시간에 열심히 작성해서 냈지만 간혹 다음날 내거나 방과후에 내는 경우도 있었다. 자기들끼리 열심히 토론하고 생각해서 머리 쥐어짜내서 내는 친구들도 종종 있었는데 그럴때마다 얼마나 기특했는지 모른다.
가장 중요한 질문의 내용은 여러가지로 구성했다. 단원의 내용과 연계하여 어떨 때는 사료 탐구, 어떨 때는 감정이입적 질문, 어떨 때는 현재의 삶과 연계, 어떨 때는 흥미있는 질문 위주로 구성했다. 비슷한 것만 물어보면 나도 성의없어 보이고 아이들도 질려 하니까 최대한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다양하게 짜도록 노오력을 했다.
아이들의 답
실제로 아이들이 쓴 것 중 정말 잘 썼거나 인상깊었던 답안들을 몇 개 모아보면서 질문도 같이 얘기하도록 하겠다.
역사교육에서 고전처럼 나오는 활동 중 하나가 바로 삼국통일에 대해 자기 스스로 평가해보기이다. 이걸로 모의재판이나 토론 활동까지 하는 선생님들도 있긴 하지만 나에게는 너무나도 귀찮기도 하고 시간도 없고 해서 활동지로 갈음했다.
다만 일부러 근거나 관련 주장을 자료로 주는 것 없이 순수하게 자신의 생각만을 쓰도록 구성했다. 그런 것들을 자꾸 참고하게되면 그대로만 쓰는 애들이 있어서.. 절대 자료찾기 귀찮아서 그런거 아님.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답안이 바로 위 답안이다. '통일'이라는 단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바탕으로 사회적 통념에 의문점을 던지는 부분이 아주 탁월하고도 신선한 접근이다.
물론 다분히 오늘날 관점에서만 통일을 바라보는 한계점이 보이긴 하지만, 신라의 삼국통일은 결코 통일이라고 볼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과 근거가 아주 논리적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우수한 답안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자신이 통일신라 말 지식인이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한 번 판단해보라는 질문이었다.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를 생각하는 것은 내 활동지의 단골 소재이긴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질문이다. 다만 이런 경우에는 당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공부를 한 친구들과 그렇지 못한 친구들의 답안 편차가 매우매우 심한 질문이기도 하다.
근데 뭐 지들이 공부 안한다는데 어쩌겠누. 공부는 자기가 깨달아야 하는 법이다.
아무튼 이 답안은 역사의 핵심 요소이자 특징 중 하나인 감정이입적 역량이 잘 드러난 답안이다. 최치원이 현명한 선택을 한 이유에 대한 자신의 근거를 나열하면서 당시 최치원이 느꼈을 감정까지 고려한 서술이 정말 놀라웠다.
내가 감정이입이라는 것을 수업 시간에 강조한 적도 별로 없고 주문한 적은 더더욱 없는데도 감정이입적 역량이 특별히 발현되는 친구들은 보면 감정이입이라는 단어 속에 뭔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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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기울었지만.. 이건 그냥 재밌어서 찍어놨던 것 같다. 아이들 중에는 이렇게 정치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도 많다. 물론 내 기억으로는 이 활동지 작성하던 때가 대선 끝난지 얼마 안 된 시기여서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를 눈앞에 둔 지금 다시 보니 더 의미심장한 것 같기도 하고..?
첫 해 제자중에 어떤 학생의 답안지가 제일 인상깊느냐? 하고 물어본다면 나는 단연컨대 이 친구를 꼽을 것이다.
위 활동지는 고려 말 원 간섭기 때 '입성책동'과 관련하여 민족 반역적인 행위에 대해 이해하고 이를 일제강점기 민족 반역자들과 연계지어보는 내용으로 질문을 구성했다. 다소 어려울수도 있었지만 일제강점기와 연계해서 아마 좀 더 쉽게 느껴진 것 같긴 하다.
다만 나는 입성책동 당시 이제현의 반박문을 좀 더 심층깊게 탐구하고 싶은 욕심이 있긴 하다. 실제로 몇몇 친구들은 이제현의 말솜씨에 많이 감탄하는 듯한 내용을 쓰기도 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될랑가.. 하여튼 시간이 문제다 시간!
아무튼 그건 제쳐두고 민족 반역자들의 반역 행위에 대한 이유를 묻는 질문에 '행복' 때문이다 라고 답한 이 학생의 답안이 너무나도 감명깊고 인상적이었다. 다분히 철학적이면서도 이상적이고 논리적이었다. 단순히 역사적인 관점에서 잘 썼다라고 평가할 수 있는 글이 아니다. 누가 봐도 평소에 책 많이 읽은 티가 난다. 웬만한 성인보다 더 낫다.
이 친구가 쓴 답안은 몇 개 찍어놨었는데 나중에 별도로 포스팅 해서 올릴 예정이다.
원래 이 활동지를 포스팅 할 때는 한 번에 하려고 했는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포스팅 하려고 한다. 심혈을 기울인 질문들과 인상적인 답안들 위주로 구성해서 아마 올해에는 수시로 올릴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은 그 중 1편일 뿐이다. 앞으로 자주 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P.S
사실 첫 제자들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정말 잘 썼다. 이런 허접한 질문에 이렇게 열심히 쓴다고? 라고 느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그 때는 내가 기록으로 남기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남아있는게 없다 ㅠㅠ 물론 몇 개 정말 잘 썼다 싶은 것들은 사진으로 찍었는데 그렇다 해도 별로 없다 ㅎㅎ 어쩌겠니 올해부터는 기록으로 남겨야지. 올해 제자들은 어떤 답안으로 나를 재밌게 해줄지 참 많이 기대가 된다.
그리고 첫 제자들의 답안과 그때 내가 느꼈던 여러 감정들은 그냥 가슴 속 추억 안에 묻어둬야겠다. 어쩌면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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