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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소비하는 인간의 역사
최근 역사학계를 강타하고 있는 트렌드라면 단연컨대 '미시사'일 것이다.
기존의 역사 연구는 정치나 거대담론, 전체적 구조 또는 여러 영역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바라보는 방식으로 전개가 되었는데 이를 흔히 '거시사'라고 부른다.
미시사는 그런 거시사에서 벗어나 각 분야를 세밀하게 파고들거나 지금껏 주목받지 않았던 개별적 주체에 좀 더 초점을 맞추는 역사 연구의 방식을 가리킨다.
오늘 리뷰할 책인 '소비'도 아마 거시사보다는 미시사에 가까울 주제일 것이다. 이 책의 부제처럼 지금껏 소비의 역사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한 사람들이 없었을 테니까.
저자인 설혜심 교수는 연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인간의 삶을 탐구하는 모든 것을 주제로 역사를 연구하시는 분이라고 한다. 꽤나 자기소개가 멋있어 보이는데 전공 하나 없나 라고 생각해서 논문 목록을 보니 근대 영국 또는 여성사를 전공하신 듯 보인다. 어쨌든 거시사보다는 미시사에 관심이 있는 교수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무튼 이 책은 굿즈, 세일즈, 컨슈머, 마켓, 보이콧의 5가지로 분류해서 소비를 매우 흥미롭게 접근하고 있다. 각 분야별로 재밌었던 부분만 요약해서 설명하는 식으로 리뷰를 진행할 예정이다.
굿즈와 욕망
굿즈(goos)라는 말은 본디 상품 또는 재화 그 자체를 의미하는 표현이지만 우리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서 특정 그룹을 대상으로 내놓는 2차 창작물 정도로 인식을 하고 있다. 아이돌 굿즈같은 게 대표적이다.
저자는 아마도 특정 대상을 타깃으로 해서 내놓은 제품들, 그리고 그런 제품들을 수집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많은 대상들의 행동을 욕망이라는 단어로 풀어낸 것 같다. 실제로 챕터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굿즈'보다는 '욕망'에 더 초점을 맞춘 것 같아서.
여성복이 비싼 이유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왜 신부의 드레스가 신랑의 턱시도보다 비싸냐는 것이었다. 서양에서 여성복이 남성복보다 훨씬 더 고가에 거래되는 이유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다음과 같다.
본디 사치라는 것은 그다지 좋은 덕목은 아니었다. 누구나 사치를 부리고 싶어했지만 사회적 분위기는 결코 사치에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점. 그런 가운데 남성들은 자신들이 가진 부의 과시를 여성들을 통해 대리로 표출했다는 것이다. 코르셋과 큰 모자, 하이힐, 드레스 등 수많은 도구들은 사실 '굳이' 필요하지는 않은 복장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부의 과시로 여겨졌다는 것이다.
여기에 18세기 산업혁명의 발전과 함께 필요한 물건들이 대량 생산되면서 더더욱 소비할 수 있는 환경이 늘어나게 되었다.
결국 이렇게 소비가 자유로운 환경에 접해진 결과 여성은 직업이나 이익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부유한 남성의 부인으로서 '과시적' 소비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 골자이다.
물론 다분히 성적인 관념에서 사치를 바라본 접근이라 거부감이 들긴 하지만, 꽤 그럴듯한 주장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시 여성과 남성이 사회에서 차지하고 있던 위치가 서로 달랐다는 것이었으며 이것이 결국 소비 문화에서 차이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세상은 지금도 이러한 관점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소위 말하는 '된장녀'라느니 '퐁퐁남'이라느니 하는 표현도 본질은 여성의 과소비에서 나온 것이니까. 그러나 이런 단어들을 운운하기에는 세상이 많이 바뀌고 있다. 여성도 경제 활동의 주체가 되어가고 있는 세상이다.
'남편의 벌이에 의존해서 돈을 펑펑 쓴다는 고전적인 아내의 이미지'는 이미 많이 바뀌었다는 점을 꼭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여전히 그런 현상들이 남아있는데?' 라고 반문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지금도 지구 상에는 식인을 하는 부족들이 남아있으니 지구인들은 야만적이다 라고 말할 일인가.
아무튼 최근에 간 결혼식에서도 여전히 신부의 드레스는 화려했고 그에 비하면 신부의 정장은 수수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변할까? 신부의 드레스가 간소화해질까, 아니면 정장이 화려해질까, 아니면 기존의 현상이 더 고착화될까? 갑자기 새삼 궁금해진다.
세일즈와 유혹
여기 챕터 중에서 돌팔이 의사와 특허약에 대해 다룬 내용이 다소 흥미로워 간단히 소개를 해본다.
18~19세기 유럽에서는 돌팔이 의사들이 팔던 '매약'들이 많았다고 한다. 매약이란 정식 허가를 받고 약국에서 판매하는 약이 아니라 개인이 판매하는 약들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매약이라고 하면 '활명수', '안티프라민' 같은 것들이다. 코카콜라도 원래는 매약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들이 약을 팔 때는 항상 광대를 동원해서 공연을 펼쳐서 사람들을 모으고 어느정도 모였다 싶으면 약을 소개한다. 그리고 짜고 치는 고스톱 마냥 약으로 효과를 봤다는 사람들이 등장해서 청중을 선동해서 약을 판다. 그러면 사람들이 여기에 속아서 약을 구매한다.
요즘으로 치면 말도 안되는 것 같지만 사실 요즘도 충분히 먹히는 사업이다. 지금도 정력에 좋다느니 하면 아묻따 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그러니 당시에는 아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19세기가 되면 광고의 발전과 함께 매약 행위도 날개를 달고 발전한다. 발모제나 감기약 등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선전을 하면서 마치 효능이 있는 것처럼 광고를 했다. 물론 엄청난 부작용이 뒤따랐음은 말할 것도 없다.
서두에서 언급한 코카콜라도 원래는 '프렌치 와인 코카'라는 이름으로 강장제로 판매되었으나, 나중에 알코올 성분을 빼고 설탕을 넣은 것이 오늘날의 코카콜라로 발전하게 되었다.
아무튼 이러한 매약 판매 행위는 정부에 의해서 제지받았지만 이미 정통의학계에도 깊숙히 파고든 덕분에 완전한 근절은 불가능해졌다. 아니, 지금도 비아그라 같은 약품들이 여전히 많이 판매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19세기에 본격화된 약 광고는 멀쩡한 신체 상태도 혹시 아픈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만들어냈다. 아파서 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약이 '공급'되기 때문에 그것을 갖고자 하는 새로운 욕망이 생겨난 것이다."
나는 이 말이 정말 뼈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인들은 늘 아픔 속에 살면서 건강을 찾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살아간다. 매약은 그런 현대인들의 욕구를 가장 잘 긁어주는 사기 행각이 아닌가 싶다.
사기 업체를 전문으로 저격하는 유튜버 '사망여우'가 몇 년 전에 인사돌과 이가탄을 저격했던 적이 있었다. 인사돌과 이가탄은 실질적으로는 잇몸 치료를 도와주는 '약'이 아님이 명백한데도 마치 광고는 '약'인 것처럼 했다는 것이다. 아마 이 업체 관계자들이 과거에 태어났으면 딱 저런 돌팔이들처럼 매약 행위를 하고 다녔겠지?
아무튼 소비자는 유혹에 빠지지 말고 현명하게 소비해야 한다는 진리를 적절한 사례를 통해 잘 보여준 챕터였다고 평가내릴 수 있겠다.
컨슈머와 소비
전통적으로 사람들이 성형하고 싶은 부위 1위는?
바로 '코'이다. 성형수술의 역사가 코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로 코는 성형수술과 관계가 깊은 부위였다. 15세기 유럽에서 매독이 유행하면서 코가 무너지자(매독균에 감염되면 코 연골이 붕괴된다고 한다) 이 코를 살리기 위해서 성형수술이 발전한 것이다.
나치가 유럽을 지배할 때도 유대인들이 매부리코를 가지고 있다고 운운하면서 신체적 특징으로 유대인을 규정하려고 하자 유대인들 사이에서 코 성형수술이 엄청 성행했다고 한다.
동양인들이 서양인을 비하할 때 '코쟁이'라고 비하하듯이 코라는 것은 꽤나 다른 이질감을 주는 요소인 것 같다.
그런데 이걸 제치기 시작한 부위가 바로 '유방'이다. 전통적으로 보면 이상적인 가슴의 모양에 대해서 시기별로, 문화권별로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자 이러한 이상적인 가슴의 모양을 만들기 위해 유방 수술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재밌는 것은 아르헨티나는 유방 확대 수술이, 브라질은 유방 축소 수술이 매우 유행한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큰 유방에 대한 에로티시즘한 판타지가 존재해서 가슴을 확대하는 수술이 매우매우 발전한 나라라고 한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맨날 월드컵이니 올림픽이니 하는 시즌이 되면 유독 '아르헨티나 가슴 노출녀'들이 이슈가 되었던 적이 많았다. 그 동네는 아예 큰 가슴을 유지하는 것이 성인식으로 여겨진다고 한다나 뭐라나..
반면 브라질에서는 워낙 흑인 노예제도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탓에(1888년) 흑인들이 가지고 있던 상대적으로 큰 유방에 대한 반감으로 이들과 구별짓기 위해 유방 축소 수술이 매우 성행한다더라. 대신 상대적으로 엉덩이를 강조해서 가슴은 축소하고 엉덩이는 풍만하게 만든다(엉덩이 미인 대회도 있다더라). 그래서 브라질은 인구 대비 성형수술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그렇다면 성형수술은 어떤 소비일까. 개인의 만족을 위한 소비일까, 아니면 사회적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한 소비일까. 다소 인문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사회가 인정하는 미를 충족하려는 욕구는 어느 시대나 다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돈만 주면 다 뜯어고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원하는 외모를 얻은 사람들은 이를 통해 외모를 과시하고 다닌다.
그렇게 놓고보면 성형수술은 2가지가 다 해당되는 소비가 아닐까 싶다. 물론 난 부정적이다. 그냥 생긴대로 살지 뭐ㅎ
보이콧과 거부
마지막으로 다룰 주제는 바로 불매운동이다. 그 중에서도 흑인들의 불매운동을 다룬 사건이 매우 흥미로워서 소개하고자 한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은 언제나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노예해방령이 발표되었지만 여전히 흑인들에게는 많은 기회가 제공되지 않았고 항상 가난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백인들은 '분리평등'이라는 원칙 하에 흑인과 백인의 철저한 분리를 주장했다. 법적 차별만 철폐되었지 사회적 차별은 철폐되지 않은 채 여전히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흑인들이 주도한 것이 바로 '보이콧' 운동이었다. 1960년대 미시시피 주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미국의 상당수 옷 가게는 흑인들이 오면 싸구려 옷만 잔뜩 내놓는 방식으로 장사를 했고 탈의실 이용도 불가능하게 했다. 흑인들이 오면 뭔가를 훔쳐갈 것 같다는 인식이 있어서였다.그러자 흑인들은 이런 행위를 일삼는 옷가게의 옷을 입지 말자는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불매운동은 곧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엄청난 사회적 파급력을 가져왔다. 백인들은 애초에 흑인들이 이렇게 집단으로 저항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그 반대로 행동했기에 적잖이 당황했다. 시위가 격화되자 흑인은 물론이고 백인들도 조금씩 발걸음을 멈추기 시작했다.
그 결과 조금씩 흑인들에 대한 이런 차별 문화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흑인 점원을 고용하는 가게도 늘어나고, 1974년에 미시시피주에 처음 입점한 월마트 같은 경우에는 흑인 전용 출입구도 폐지해버렸다. 집단 행동을 통해서 마침내 불합리한 결과물을 바꾼 것이다.
나는 이것을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불매운동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왜 긍정적이라는 단서를 붙였나면 모든 형태의 불매운동이 이렇게 긍정적이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챕터를 읽으면서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일본 상품 불매운동이 떠올랐다. 물론 유니클로 불매운동 같은 경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 나머지는 억지도 너무 억지가 따로 없다. 일본차가 아파트 주차장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테러를 하는 행위 말이다.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반일 감정을 조장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이익 집단과 정치적 행위에 불과한 아주 저급하고 비열한 불매 운동이다.
이처럼 불매 운동은 양날의 검이다. 진정으로 현명한 소비자가 되려면 불매 운동의 취지를 고려하고 이해 관계를 따져서 구매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정말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을 바꾸기 위한 불매라면 적극적으로 참여해도 좋겠지만 그렇지 않고 선동과 날조 및 소비자를 무기로 삼아 이익을 얻기 위한 특정 세력의 권모술수라면 기꺼이 불매운동을 불매해야 한다.
아무튼 이 책은 이렇게 소비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적 장면들을 통해서 소비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보게 만들 수 있는 아주 재밌는 책이다. 전공자가 쓴 글이라서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으나 한 번쯤 도전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평가와 함께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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