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서적 리뷰 5 -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리뷰 by 김범석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인간은 죽음 이후의 삶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죽으면 끝이니까. 물론 더러는 사후세계가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우리가 가본 적이 없는 길이니 알 도리도 방도도 없다. 천국과 지옥이 있는지 여부는 죽은 사람들만이 알 일이지 산 사람이 뭐 어찌 할 수가 없지 않는가. 산 사람들에게 사후세계란 그저 믿음의 영역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니 다들 현실에 충실할 수 밖에. 


그래서인지 일반적으로는 살아가는 현실에서 죽음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 책은 거꾸로 접근하고 있다. 죽음에서 삶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 그것이 바로 이 책의 핵심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이 책을 지은 저자 김범석은 서울대학교 종양내과 전문의이다. 암을 치료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소개글부터가 꽤 재밌다.



'서울대학교 암 병원 종양내과 전문의. 항암치료를 통해 암 환자의 남은 삶이 의미 있게 연장되도록 암 환자를 돕는 일을 하고 있다.'



남은 삶의 의미 있는 연장이라니,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표현인가. 뭔가 열심히 치료하고 그런 이미지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를 보는 듯한 문구였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나면 이 문구가 정말 잘 이해가 된다. 



책의 전반적 내용은 저자가 암 말기 환자들을 상대하면서 겪는 에피소드와 느낀점으로 구성되어있다. 일종의 수필인 셈이다. 


그리고 책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암 말기 환자이다. 그리고 대부분이 죽었다. 과연 저자는 그 죽음의 문턱에서 무엇들을 느꼈을까. 생사를 넘나드는 환자들을 수없이 상대하면서 무슨 감정이 들었을까.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를 글로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많은 에피소드들을 다 적을수는 없고 몇 가지 이야기만 적고자 한다. 




항암치료


항암치료는 정말 고통스럽다고 한다. 나도 안 겪어봐서 모르고, 겪어보고 싶지도 않지만 어쨌든 고통스럽다고 한다. 빈혈, 구토(특히 항암제 냄새 때문에 구토가 매우 심하다고 한다), 출혈, 탈모, 우울 등등 상상 이상의 부작용이 따른다. 항암치료의 목적이 만약 완치에 있다면 당연히 받고 싶을 것이다. 실제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심정으로 달려드는 환자들이 상당수이다. 물론 그 고통은 본인이 감내해야 하겠지만. 


그런데 항암치료를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나중에 매달리는 환자들이 있다. 처음에는 고통이 작아서 거부했다가 종양이나 암이 커짐으로써 생기는 고통이 너무 심해서 마찬가지로 고통스러운 항암치료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의사로서 너무 난처한 순간이라고 한다. 이미 항암치료를 버틸만한 체력이 안 되서 치료 받다가 죽을 것 같은데 어떻게 진단을 해주겠는가.


이런 상태에서 항암치료를 진행하면서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을 지켜보는 것은 의사로서도 참 고통스러운 순간일 것 같다. 왜 (상대적으로) 쉬운 길을 어렵게 돌아가서..   


판단 하나로 목숨의 생사가 결정지어지는 의사의 심정이 정말 잘 담겨있다. 교사는 어떨까. 교사도 별반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누가봐도 저 학생이 저대로 가면 삼천포로 빠지는 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순간이 없다. 수렁과 늪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건져주는 것이 교사가 할 일일까. 아니면 가만히 지켜보면서 기다려주는 것이 할 일일까. 내 수준에서는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 어떤 행동이 정답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게 교사로서 가야 할 정도의 길일까.


교사가 학생에게 해주는 조언이나 말 한 마디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는 요즘이다. 어렸을 때 교사가 해준 따뜻한 말 한마디에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큰 트라우마로 남기도 한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말에서 그런 것들을 느끼기도 한다. 나도 지난 세월을 반성하게 만든다. 아직도 교사로서 갈 길은 멀다. 







자살


항암 치료를 20대 초반부터 꾸준히 받아왔던 여성 환자가 한 명 있었다. 부모님의 이혼과 새어머니의 괴롭힘 등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항암 치료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고 완치를 눈앞에 두었던 순간. 그 여성 환자가 결국 베란다에서 투신 자살을 하여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일단 뭐 자살이 맞는지 아닌지는 차치할 문제일테고. 저자는 혹시 환자가 준 자살의 시그널이 있었는데 이걸 놓친게 아닌지 한탄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름대로 환자의 자살을 분석했다. 부지불식간에 치솟은 죽음의 생각이 결국 기나긴 항암치료를 버티면서 가져온 삶의 의지를 한 순간에 무너뜨린 것 같다고. 


교사로서 아이들이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를 잘 파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나는 이 대목에서 유독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자살', '죽고 싶다' 같은 단어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요즘 아이들은 확실히 옛날보다 죽음에 대한 단어를 쉽게 내뱉는다. '자살 마렵네' 라든가 '한강 물 차다', '죽어 버려야지 그냥' 등등. 장난으로 하는 말이기에 그 깊이는 매우 가볍지만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접근하는 것도 가볍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만 볼 수 없는 현상이다.



누군가는 살기 위해 아둥바둥 치다가도 한 순간에 죽음의 유혹에 이끌려 죽음을 선택한다. 평소에 내뱉는 죽음에 대한 가벼운 생각과 말들은 아마 결정적인 순간에 결코 가벼운게 아닌 아주 결정적인 판단으로 다가올 것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길




가끔씩 환자들 중에는 죽을만한 상황인데도 계속 버티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의사들은 출근하면 환자의 바이탈 시트를 먼저 확인한다. 환자의 혈압, 체온, 맥박수, 호흡수를 기록한 그래프라고 하는데 지난 수십년간 수많은 환자들의 바이탈 시트가 데이터로 누적되어있다보니 매우 정확하다고 한다. 바이탈 시트가 널을 뛰면 환자도 곧 세상이 떠날 순간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널을 뛰는 바이탈 시트 속에서도 유독 버티는 환자가 한 명 있었다. 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환자는 계속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버티는 환자도, 옆에 있는 보호자도, 치료를 해야하는 의사도 모두가 고통스러운 상황. 


그런 환자는 기가막히게도 환자의 자녀를 보고 난 후 1시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이들을 보고 싶어서 계속 버텼던걸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가끔씩은 과학적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환자들이 있다고 한다. 분명히 과학적으로는 하루를 버티기도 힘든데 일주일을 넘게 버티는 환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에 대해 다른 식으로 생각하면서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지만 나는 왜 그렇게 버틸 수 있는가에 대해 답을 하고 싶다. 답은 간단하다. 그냥 인간이니까. 인간은 가끔씩은 모든 추정치를 벗어난 행동들을 한다. 아무리 심리가 인간의 현상을 관찰하고, 철학이 인간의 생각을 추론하고, 과학이 인간세상을 둘러싼 자연을 분석하고, 역사가 인간의 행동을 데이터화시켜도 인간은 언제나 그러한 예상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항상 돌발변수를 가진다. 그게 인간이다. 왜냐면 인간은 생각을 하는 동물이니까. 제아무리 AI가 날뛰고 인간보다 뛰어나다고 해도 AI는 절대 인간을 뛰어넘을 수 없다. AI는 돌발변수가 나타나면 고장이 난다. 하지만 인간은 변수를 만들어내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감정과 이성의 총체는 언제나 이렇게 변수를 만들어냈다. 한낱 로봇 따위가 흉내는 낼 수 있겠으나 결코 본질에는 가까워 질 수 없을 것이다. 








결말 알고 보는 드라마




암 투병 중에 결혼을 한 케이스가 있다고 한다. 담당 의사조차도 '축하해요'라는 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의사의 입장에서 죽음으로 가는 길에 웬 결혼.. 이라는 생각이 나올 법도 하다. 


남편 쪽도 그 사실을 다 알고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던가. 암세포는 뇌로 전이되어 결혼 후 몇 개월을 못 버티고 세상을 떠났다. 




여러분들은 이 에피소드가 어떻게 다가오는가. 슬픈 결말이 예고되어있는 상태에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가? 나는 선뜻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질문을 좀 바꿔보자.


시한부 인생이 예고된 사람과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이렇게 질문을 바꿔보니 그래도 사랑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고 성별(?)도 없고 종(!)도 없다는데. 시한부든 뭐든 그게 중요할까. 아마 남편 분이나 환자나 사랑 앞에서 시한부 인생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을 것 같다. 어쩌면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고. 물론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늘 좋아질 가능성만을 염두에 두고 산다. 주식이 떨어질거라고 예고되었는데 그걸 구매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에만 매몰되면 다양한 가능성을 볼 수 없다. 마치 시한부 인생에만 초점을 맞춰서 사랑이란 감정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저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무엇에 중점을 두고 있는가, 어떤 가치관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가에 따른 선택 말이다. 



그 선택에 비난할 필요도 없고, 손가락질 할 필요도 없다. 선택의 책임은 오롯이 선택한 자만이 가져갈 테니까.








듣는 자세


어떤 내과 교수님은 자신이 환자에게 처방하는 약을 다 먹어본다고 한단다. 그래야 더 잘 알 수 있으니까. 저자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어떤 환자가 항암치료 얘기를 듣다가 A약이 B약보다 더 덜 힘들 것이라고 설명을 하자 "그걸 어떻게 알아요? 선생님은 맞아본 적 없잖아요." 라고 했다고 한다. 


저자는 그 이후에야 환자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행동인지 깨달았다고 한다. 겪어봐야만 알 수 있는 일도 있지 않는가. 상대를 이해했으니 이제는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다 안다는 그 오만을 경계해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나는 이걸 읽으면서 전문가에게 뱉는 말 치고는 좀 오만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세상에는 겪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아무렴 전문가인데 그 정도도 몰랐으려고? 그러나 이해라는 영역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많았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이것과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이해와 오해 라는 제목의 내용인데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 만큼 오만한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완전히 이해했다는 그 생각이 바로 크나큰 오해인 것이다. 




갑자기 학생 상담을 하던 수많은 순간들이 떠올랐다. 대부분의 경우에 아이들의 행동은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걸 바꾸려고 노력하고 설득시킬 때도 많다. 그렇게 해서 바꿀 수 있다면 다행인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얘는 어느정도 잘 알고 있으니 굳이 얘 이야기를 많이 들을 필요는 없다' 라고 생각할 때이다. 그런 애들은 아무래도 좀 친하거나 몇 번 비슷한 문제로 상담을 한 경우가 많다. 나도 모르게 그냥 오만해지는 것이다. 그렇게 흘려보낸 몇몇 아이들의 이야기를 생각하니 부끄러우면서도 다시 돌아가고 싶어진다. 


얼마나 귀를 기울여 듣고 있는가. 모르면 무식하다고 귀를 닫아버리고, 알면 안다고 귀를 닫아버린다. 내 듣는 자세는 얼마나 겸손한가. 얼마나 열려있는가. 겪어보지 않아도 아는지 모르는지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다. 알든 모르든 간에 얼마나 들으려고 노력을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법정스님이나 저자의 생각처럼 대부분의 경우에는 내가 사실 잘 모르는 것이기도 하고. 마음이 참 아프다. 






리뷰를 마치며



살아가면서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삶과 죽음을 생각해보는 것은 매우 다를 것이다. 물론 그러한 죽음의 문턱은 겪어보지 않는 것이 제일 좋기에 이렇게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볼 뿐이다. 책이 주는 순기능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항상 읽을 때마다 새롭고 반성하게 된다. 아이들에게도 제일 추천을 많이 해주는 책이다. 


작년에도 한 아이게에 이 책을 빌려줬는데 이렇게 포스트잇을 붙여서 돌려줬다. 





학습지도 참 똘똘하게 잘 쓰는 친구였는데 고등학교 가서도 잘 지내려나 모르겠다. 


아무튼 이 외에도 수많은 생각과 깨달음을 주는 에피소드들이 있지만 그것은 직접 읽으면서 느껴보길 바란다. 이상 리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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