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서적 리뷰] 세상을 바꾼 과학논쟁 by 강윤재

과학과 사회



과학에서 문과의 영역이 개입할여지가 있을까? 일반적인 생각이라면 "없다"가 정답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순수 인간의 힘이라고 할 수 있는 과학의 영역은 점점 더 확장해나가고 있고, 그 범위가 방대해질수록 예기치 못한 문제들도 발생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생물학과 맞물려 나타나곤 한다. 인간의 윤리적인 부분까지 과학이 건드리면서 생각지도 못한 심각한 문제들이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오늘 리뷰할 책은 그러한 과학사회적인 논쟁 13가지를 정리해서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있다. 저자 강윤재 또한 과학사회 분야를 전공한 사람인데 대학교 정교수 직을 달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그래도 전공자인데다 글이 꽤나 재밌게 읽히는 편이다. 책에서 다루는 13가지를 다 소개할 수는 없고 몇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과학자에게 사회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맨해튼 프로젝트라는 거대한 핵무기 개발계획에 착수했던 과학자 오펜하이머. 막상 핵무기 시험이 성공적으로 끝나자 그는 "나는 이미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라고 읊조렸다. 실제로 핵무기는 2차 세계대전 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탄되면서 일본의 항복에 큰 기여를 함과 동시에, 수많은 일본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도 했다. 



우리는 흔히 이 상황에 대해서 원폭 투하의 책임이 원폭을 직접 투하한 당사자 미국, 또는 끝까지 항복하지 않음으로써 투하의 빌미를 제공한 일본에 있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조금 생각이 발전해나가면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에게도 물을 수 있느냐까지 나갈 수 있다.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프로세스를 거쳐야 한다. 





첫 번째는 과학자의 가치중립을 인정하느냐 마느냐이다. 한 마디로 어떤 사실에 대해서 가치판단을 내리지 말아야 하느냐, 내려야 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실에 대해서 가치판단을 내릴 수 없다면 그 사실을 발견한 과학자에게도 마찬가지의 잣대를 들이밀 수 있다. 저자는 갈릴레이의 종교재판을 예시로 들고 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이단으로 몰릴만한 발언이었기에 가치판단이 개입되었지만 말이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라는 지극히 일반적인 사실을 발견한 것에 대해서 가치판단을 매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자들 역시 핵분열 연쇄반응이라는 지극히 일반적인 자연의 이치를 발견한 것일 뿐이라면? 더군다나 이 기술은 핵폭탄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원자력발전소를 이용해서 어마어마한 양의 전기를 생산하는 기술로도 사용되지 않는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른 부분에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핵폭탄이라는 것은 단순히 핵분열 연쇄반응만 알아내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의 노력과 헌신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열과 성을 다해 참여한 과학자들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단순한 사실을 알아내는 것과 그 사실을 응용해서 다른 기술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른 영역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사회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독일이 서로가 앞다투어 핵무기를 만들려고 했었고 그런 상황 때문에 과학자들이 핵무기를 만드는 행위는 면죄부가 제공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오펜하이머는 과학자들이 핵무기를 만드는 것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 그들이 무엇을 만드는지조차 모르게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행위에 면죄부가 부여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과학자들의 주체성을 훼손하는 행위니까. 






세 번째로 개발자와 사용자 사이의 문제이다. 어떤 것의 개발과 사용을 별도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을까? 여기서 고려할 점은 만드는 것이 어떤 의도로 만들어지는가, 주 사용 목적이 무엇인가일 것이다. 대표적으로 미국 총기협회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총이 아니라 사람이다."라고 주장을 한다. 물론 궤변에 가까운 말도 안되는 소리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 총을 만드는 목적은 거의 99% 이상이 살상용이니까. 


그렇다면 원자폭탄은? 그나마 총은 동물 사냥용으로 쓰는 용도라도 있지 원자폭탄의 사용용도는 두 말 안해도 알 것이다. 적어도 관상용은 아닐 테니까. 





결국 과학 기술을 동원하여 무기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 과학자들도 어느 정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과학자들의 능동성 확보와 책임감에 있어서도 바람직한 길일 테니까.  










사회진화론은 과학인가 이데올로기인가




생물학주의라는 개념이 있다. 인간의 행위를 설명할 때 생물학적인 원리를 이용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사회진화론'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사회진화론은 찰스 다윈이 만든 진화론이라는 개념을 사회와 국가에 적용한 것이다. 



다윈의 진화론이야 워낙 유명한 개념이니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하고(또는 책을 참고하고), 사회진화론은 사회의 진화 내지는 진보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내놓은 개념이다. 여기서 스펜서가 단독으로 고안해 낸 개념이 바로 '적자생존'이다. 다윈이 주장한 '자연선택'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개념이다. '자연선택'이란 생존에 적합하게 발전한 종이 다른 종보다 오래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라면, '적자생존'은 주어진 환경에 가장 적합한 종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회진화론은 사회 진보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비해, 진화론에서는 진화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여러모로 두 이론은 같은 듯 하면서도 다른 셈이다. 



문제는 사회진화론이 쓰이는 방향이다. 엄밀히 과학적 체계를 기반으로 설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많이 쓰이는 것은 이 이론의 지향점이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를 너무나도 쉽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사회진화론은 사장된 이론이 되었고, 지금은 그 누구도 (공식적으로는) 이런 주장을 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회진화론이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매우 명확하다. 생물학은 다른 과학과는 달리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제 2의 사회진화론이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내 생각도 이와 비슷하다. DNA와 유전자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을 '부분 창조'해내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이러다가 유전자 조작을 돈 주고 사야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 같다. 



만약 월등한 유전자가 돈 받고 판매가 된다면 인간을 돈 주고 만드는 꼴이 된다. 그러면 그 때 생기는 문제점은 예전의 사회진화론같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 사회진화론 같은 이론으로 그 현실을 뒷받침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 세력들이 태동할 날이 머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준비되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그것은 '과학의 이름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그 끝은 '기득권의 잔치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사회진화론은 우리에게 앞서 준 큰 교훈일지도 모르겠다. 그 교훈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전적으로 현대인들의 몫일 것이다. 













과학기술과 민주주의 : 원자력에너지



우리나라에서 문재인 정부의 원전 폐지 정책이 화두가 된 적이 있었다. 결국 윤석열 정부에서 이 정책을 뒤집어 엎고 다시 원전 확대 정책으로 돌아섰다. 최근 들어 난방비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이 난방비의 원인이 원전 폐지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많이 제기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고물가 인플레이션이라는 시대적 상황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화석연료를 대체할 신재생에너지의 발굴이 필요한 지금 현실에서 원자력에너지는 결코 등한시할 수 없는 가장 핫한 주제 중 하나이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원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잘못된 지식들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먼저 원전은 값이 싸지 않다. 발전 가격은 저렴할지 몰라도 핵 폐기물 처리나 보험 비용까지 고려하면 결코 싼 편이 아니다. 그리고 안전하지도 않다. 만약 폭파라도 하는 날에는 체르노빌 발전소 폭파사건같은 끔찍한 일이 다시 재발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환경친화적이지도 않다. 화석연료는 배출하지 않겠지만 방사능을 배출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우라늄 매장량의 문제가 있다. 우라늄의 매장량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화석연료마냥 고갈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차치하고 왜 우리는 원전에 대해 이토록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에너지전환이라는 문제가 우리의 삶에 너무 큰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1월 난방비 폭탄 사례 때 문재인 정부의 원전 폐지를 지목한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그것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하나의 묶음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에너지문제는 민생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도 참여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 과학기술이라는 것은 일반 대중들이 접근하기에는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 일반적인 정치나 교육, 사회적인 문제와는 결이 다르다. 물론 방금 언급한 분야들도 파고들면 한도 끝도 없긴하나 그래도 진입 장벽은 낮은 편이지만, 과학은 애초에 진입 장벽이 높다. 심지어 과학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라는 인식도 널리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과학에서는 유독 전문가주의가 팽배한 편이다. 물론 아주 유명한 사례인 임산부 약품 탈리도마이드 사건처럼 전문가들도 실수를 하는 편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전문가의 신뢰성과 전문성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특히 과학기술처럼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고려해야할 사항이 있다. 가장 먼저 전문가들을 뒤에서 연구비 등으로 조종하는 기업은 없는지(예컨대 담배회사처럼), 전문가들 자신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은 아닌지(원전 전문가들처럼), 정치적인 입김은 없는지 등이다. 



다시 말하면 과학기술에서도 전문가주의적인 행태를 내려놓고 시민참여적인 형태로 숙의를 거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여기에 반은 공감하고 반은 공감할 수 없다. 공감하는 부분은 전문가들에게도 분명히 입김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같은 사람에 불과하고 그들도 분명히 수많은 이해관계에 얽혀 있다. 그들에게 전적으로 모든 것을 맡길수는 없다. 안 그러면 제2의 오펜하이머 꼴이 날지도 모른다.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은 그 시민들도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여기에 참여하는 시민단체 역시 수많은 보조금을 통해서 특정 정치세력 내지는 집단과 이해관계로 얽혀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해당 분야에 대한 얄팍한 지식과 무지몽매한 태도로 과학적 태도를 망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민주주의와 과학적 전문성이 하나로 힘을 합칠 경우 분명히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건전한 방향으로 사회가 발전해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리뷰를 마치며 



13가지(마지막 챕터까지 14가지긴 하지만) 중 3가지 정도만 소개하면서 글을 마친다. 사실 대단한 전문적 지식이 동원하는 챕터는 많지 않기 때문에 글 자체가 라이트해서 쉽게 읽히는 편이다. 뭔가 대단한 무언가를 얻기 보다는 논쟁점과 관련된 부분이 많기 때문에 생각할 거리도 꽤 많다. 



내 역사 활동지에 응용할만한 주제도 몇 개 있고, 실제로도 활용 중인 책이니만큼 시간 날 때 가볍게 한 번씩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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